봉림대군 효종의 북벌론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 1649년 인조가 죽자 봉림대군은 왕위에 올라 17대 왕 효종이 된다. 아버지 인조 때 청나라의 침입으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으나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고 만다. 머리를 청나라 황제에게 조아리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많은 고생을 한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청나라에 끌려온 뒤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온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하려고 노력했다. 또 청나라에 있으면서 서양의 훌륭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다짐을 했다.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청나라에서 오랜 볼모생활을 마치고 ..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 조선시대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붙였다. 왕, 왕비,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의 무덤은 능이라고 불렀다. 후궁의 무덤으로 왕세자의 친모의 무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의 세자빈의 무덤 등은 원이라고 불렀다. 그외 일반 사대부들의 무덤은 죽은 사람의 이름 뒤에 묘라고 불렀다. 그런데 능, 원, 묘의 세 가지 이름을 모두 가진 무덤이 있었다. 바로 융릉이다. 임오화변 발생 영조는 조선 21대 왕이다. 영조 재위 38년 신하들의 당파 싸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아들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는 임오화변(1762년)이 일어난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정조 영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라고 부르고 장례를 신속하게 마쳤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 등으로 진화하면서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이란, 이라크를 거쳐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나간다. 그렇게 먹을 것을 찾으러 정처없는 여행을 하다가 약 70만년전 한반도에 들어온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1983년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는 약 4만년전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시대 어린아이 화석이 발견된다. 석회석 광산을 찾기 위해 헤매던 김흥수 씨는 동굴 속을 살펴보다가 사람 뼈를 발견한 것이다. 발견 당시 석회암 바위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고운 흙이 뿌려져 있었고, 그 흙 속에서 국화꽃 가루가 발견되었다. 오늘 날에도 장례식장에 가면 국화꽃으로 돌아가신 사람을 추모한다. 그 옛날 구석기인들도 국화꽃을 사용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죽은..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유신시대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유린당했다고들 한다. 1974년 7월 천주교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을 한다. 유신헌법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다르게 폭력과 공갈에 의한 국민투표이므로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된다고 말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 양심선언으로 구속이 되고, 15년 형을 받는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이를 반대하며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천주교의 젊은 신부들이었다. 1974년 9월 23일 지학순 주교의 석방, 유신 철폐,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300여명의 젊은 신부들은 을 결성한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1000명 정도의 신부님들이 있었는데, 그중 300명이 모였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함세웅 신부는 당시 명망있..
공자와 안회의 일화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 공자는 자신의 도덕정치를 펼칠 왕을 찾아 나섰다. 공자 일행은 쉬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였다. 많은 어려움이 이겨내며 오랜 기간 여행을 했던 공자 일행은 어느 산 속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쉬면서 공자의 제자 안회가 쌀 주머니를 열어보니 쌀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걸어오면서 쌀알을 떨어뜨리며 온 것이었다. 식량이 다 떨어져 먹을 것이 없던 공자와 제자들은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고 먹을 것을 찾았다. 배가 고프니 나물이라도 먹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주린 배를 나물로 채웠다. 그 다음 날도 나물을 먹고, 그 다음날도 나물을 먹었다. 나물만 먹으니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산 속을 벗어나면 먹을 것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앞으로 나아갔다. 제자들은 너무나 ..
조선 19대 왕 숙종은 장희빈 사이에서 경종이 태어난다. 또 숙종과 무수리 숙빈 최씨 사이에서 연잉군 후에 영조가 태어난다.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왕위를 잇는다. 하지만 경종은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후사도 없었다. 경종 집권파인 소론은 늘 이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야당 격인 노론은 경종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연잉군을 차기 왕으로 점찍고 연잉군에 붙어 선다. 그리고 경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세제를 책봉하고, 경종이 몸이 편찮으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라고 간언을 한다. 경종의 사망 경종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킨다. 소론에 의해 자신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이 다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으니 연잉군도 매우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루는 아픈 경종에게 쾌차하라는 의미로 감과 간장게장을 ..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간 사람들 1950년 한국 전쟁 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최빈국 중 하나였다. 미국에서 무상 원조로 간신히 연명하며 살아가던 시대였다. 그런데 미국이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정책을 바꾼다. 유상 원조를 받으려면 돈을 갚을 수 있도록 경제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1963년은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1억달러 미만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차관을 들여와야했다. 우리나라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미국은 돈을 갚을 수 없는 계획이라고 판단해서 차관 요청을 거부했다. 이때 서독을 새로운 외화 획득의 대안으로 봤다. 당시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울 만큼 경제가 활성화 되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서독의 막장에서 일할 서독행 광부 모집을 하였다. 20~35살의 젊은 사람들..
4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내용 관학파는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세력을 말한다. 관학파는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진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 계유정난인데 수양대군의 행동을 지지한 세력이 훈구파이다. 그런데 훈구파가 정권을 잡은 이후 관학파의 정신을 점점 잊고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는 일이 많았다. 이런 훈구파의 도덕적 타락과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재야의 세력들이 중앙 권력에 도전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사림파이다. 성종은 사림파들을 등용하여 3사(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에서 일하게 하였으며 이들은 훈구파들이 잘못하는 일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이때에는 훈구파와 사림파는 큰 문제없이 넘어간다. 하지만 연산군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문제가 달라진다. 연산..
고조선 단군신화 8조법 부여의 법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BC 2333년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이다. 최초의 군장국가이며, 건국 이념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이다. 고조선 건국이야기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쓰여 있다. 예전 시험 문제를 보면 단군신화와 관련이 먼 것을 고르라는 문제에 삼국사기가 보기로 나오기도 했다. 단군신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천제의 아들 환웅이 내려왔다고 했다. 이는 우리 민족이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엿볼 수 있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농업 중심의 사회임을 알 수 있다. 홍익인간 이념으로 다스렸다는 것은 백성이 근본이라는 사상을 알 수 있다. 곰이 웅녀로 변해 혼인하여 ..
노인동맹단 강우규 의사 사이토에게 폭탄 투척 단두대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백발의 우국지사 강우규 백발의 우국지사인 강우규가 남긴 시이다. 강우규는 평안남도 덕천 출신으로 친형에게 배운 한학과 한방 의술을 바탕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교육사업에 뜻을 두었으며 이동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이를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홍원에 영명학교를 세우고 교회도 세웠다. 하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북간도로 이주하여 의술을 베풀고 조선의 독립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1915년에 중국 지린성 요하현에서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을 건설했다. 1917년에는 동광학교를 세워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노인동맹단 활..
김재규 차지철의 관계 차지철은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용하도록 추천한 인물이다. 차지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술과 여자를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이라며 추천한 것이다. 이렇게 경호실장으로 발탁된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를 밀어내고 권력 2인자가 된다. 5.16 쿠데타 시절 차지철은 대위 경호실장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를 화나게 하는 월권행위가 많았다. 5.16 군사쿠데타 시 차지철 계급은 대위, 김재규는 준장이었다. 그런데 경호실장이 되고 나서는 김재규를 김부장이라고 하대하며 부르는 것이 상당히 기분 나빴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치적인 문제는 주로 중앙정보부에서 다루었는데, 차지철의 경호실이 정치문제까지 개입하게 된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에 정치 공작을 지시하기도 ..
선사시대 의식주 및 유적지 구석기시대 의식주와 유적지 구석기 시대는 지금부터 약 70만년전에 전개되었다. 도구는 주로 있는 그대의 돌이나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옷은 동물의 가죽을 입었고, 식생활은 사냥이나 채집, 어로를 통해 해결하였다. 집은 자연 동굴에서 생활하거나 이동생활을 하므로 아무렇게나 지은 막집에서 생활했다. 구석기 시대에는 모두 평등한 사회이며 무리를 지어 이동 생활을 하였다. 대표적 구석기 유적지는 연천 전곡리, 공주 석장리, 청원 두루봉 동굴, 평안남도 상원 검은모루 동굴,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 유적, 단양 수양개 유적 등이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도구을 사용한 것이 뗀석기라고 했다. 이중 주먹도끼는 짐승을 사냥해서 가죽을 벗기고, 땅을 파서 먹을 것을 찾는 이 당시의 맥가이버 칼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