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과 의자왕, 백제 멸망 원인은?
- 역사공부
- 2021. 10. 23. 08:04
계백과 의자왕, 백제 멸망 원인은?
백제는 의자왕이 왕위에 올라 신라 성을 40여개 빼앗았다. 이에 신라의 김춘추는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이 수모를 갚을까? 라는 생각에 당나라에 협상을 하러 간다. 당의 황제 태종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보복을 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춘추가 와서 나당 연합군을 조직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친다는 제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당나라는 혼자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 보다 누군가 도와주면 훨씬 수월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신라가 도와준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웠을까?
백제와 당 외교
백제도 나름대로 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외교를 잘해왔다.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칠 때 금칠 갑옷을 선물로 줄만큼 당과 친선을 맺고자 노력해 왔다.
당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면 상대적으로 강대국인 백제보다는 신라와 손잡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또 강대국 백제와 싸우는 것보다 약소국인 신라와 싸우는 것이 승산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은 우선 백제를 치고, 고구려도 칠 것을 계획한다.
백제 지도층의 내분
한편 백제는 의자왕이 등극하여 전쟁도 벌였지만 내부적으로 북쪽에서 이주해온 부여씨족들과 토착세력과의 갈등이 있어 왔다. 이때 왕의 처가였던 사택씨의 재상과 왕비가 죽자 이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좌평직을 준다. 자신의 세력으로 권력을 강화한 것이지만 토착 귀족층을 몰아내면서 이들과의 갈등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나라의 힘이 한데 뭉쳐질 수 없는 구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의 소정방이 13만 대군과 신라 5만 군대가 백제를 협공한다.
실패한 백제의 방어전략
백제는 부랴부랴 대책회의를 열었다. 탄현과 백강의 입구에서 미리 막을 것인가 아니면 안으로 끌여 들인 후 공격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성충과 흥수는 미리 막아야 한다고 했으나, 좌평들은 끌여 들인 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군은 벌써 탄현을 넘어 사비성을 향하고 있었다. 이에 백제는 계백장군이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를 막기 위해 출발한다. 군사 수가 적은 백제군은 용맹하게 싸우며 신라군을 무찌르니 신라군은 사기가 떨어지게 된다. 이때 화랑 관창을 적진으로 보내 백제군과 싸우지만 포로가 된다. 계백은 너무 젊은 소년이기에 돌려보내지만 또다시 무모하게 싸우러 오는 관창의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묶어 보낸다.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을 보고 갑자기 사기가 끓어올라 백제군을 단숨에 무찌른다.
한편 백제의 주력부대는 당을 막기 위해 떠난다. 당은 기벌포에 상륙했다. 갯벌이라 땅이 푹푹 꺼지는 형국이므로 이곳에서 얼른 공격했다면 당은 아마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백제는 안으로 끌여들인 후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으므로 당나라 군사들에게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 멸망 원인
1. 지도부의 내부 분열
-의자왕은 귀족들과 토착세력을 품지 않고 왕권 강화를 했다. 이에 귀족층들은 불만을 품었다. 왕과 귀족의 분열로 국가의 힘을 모으지 못하게 되었다.
2. 의자왕의 실정
의자왕은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실정을 했다고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정도로 실정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의자왕이 처음에는 총명했다고는 하지만 나중에 정치를 잘못하여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잦은 전쟁과 해상 침투의 취약성
백제는 신라와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졌습니다. 당은 해상을 통해 쳐들어왔는데 이를 막을 수 있는 전술도 부족했습니다. 당의 전술을 대비 못한 백제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4. 외교력의 실패
나제동맹이 깨지자 백제는 고구려와 연대하려고 했다. 고구려는 당과 대치 중이었는데 백제가 고구려에 붙으면 당은 좋은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그런 신라를 백제가 공격하니 당의 입장에서는 백제가 아닌 신라와 협력 관계로 맺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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