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금주령, 실패로 끝나다.

영조의 금주령, 실패로 끝나다.

 

옛 임금들은 금주령을 시행하여 국가의 기틀을 바로 잡고 사회 기강을 세우고자 했다. 처음에는 술의 원료인 식량을 절약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으나, 이것과 더불어 사회 교화가 목적이 되기도 했다. 식량이 부족하면 술을 만들어 마시지 말라는 금주령이지만, 백성들의 음주 습관이 예법을 이탈하게 되므로 식량 절약에서 사회 교화 쪽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조선 역사상 금주령을 강조한 왕은 영조가 아닐까 생각된다. 영조 32년 1756년부터 조선 역사상 강력한 금주령을 내린다. 술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이므로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행동을 절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술을 빚어 마시다가 걸리면 사형까지 당했고, 한 집이 위반하면 다른 집도 처벌 받는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우리 집 가족이나 이웃집 사람들 중 누가 술을 마시는지 수시로 감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도세자도 금주령

아들 사도세자에게도 금주령은 예외가 없었다. 늘 못마땅한 사도세자였는데 세수도 잘 하지 않아 초췌한 모습을 보일 때는 술을 마셨느냐고 다그친 일도 있었다. 아버지 영조의 다그침에 허위로 술을 마셨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 기강 확립을 위한 금주령은 아들 사도세자에게도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다. 

사도세자에게도 엄격했으니 일반 백성들에게도 금주령은 엄격했다. 조정 대신들이 생각하기에도 금주령은 백성들을 옥죄는 과도한 법이었다. 그런데도 임금에게 감히 간하지 못했다.

 

그런데 금주령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아들 문제와 정국을 바르게 이끌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너무 힘들 때에는 술을 마시던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영조였다. 사도세자, 신하, 백성들에게는 엄격하게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작 본인은 술을 찾았던 것이다.

스스로 어긴 금주령

영조는 자신이 마시던 것은 소나무를 원료로 만든 송절주였다. 그런데 송절주가 아니라 송절차라고 하며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몸에 좋은 약을 마셨다고 둘러댔다. 어떤 때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술을 너무 마셔서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다. 

스스로 지키기 어려운 금주령을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강요하니 그 법이 제대로 지켜질 수가 있을까? 오히려 금주령 이전보다 사회적 기강은 무너지고 과도하게 술을 마시는 일이 빈번했다. 백성들은 강압적인 금주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몰래 술을 만들어 먹거나 비싼 값에 거래하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법이지만 백성들을 옥죄는 법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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