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강창성의 악연

전두환과 강창성의 악연


  때는 1973년, 윤필용 사건이 일어난다. 윤필용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는데 술자리에서 중정부장 이후락에게 박정희 후계자로 형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박정희에게 들어가 윤필용과 그 측근들이 쿠데타 혐의로 구속되어 처벌을 받았던 사건이다. 윤필용 사건을 조사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윤필용이 후원자 역할을 한 하나회라는 존재를 알게 된다. 


하나회의 존재를 알게 된 강창성

  강창성은 하나회를 뿌리 뽑으려 했고 하나회 전두환도 조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전두환 등 하나회는 오랜 인연이 있던 청와대 박종규 경호실장 덕분에 간신히 군부내에서 살아남는다. 강창성 또한 경상도 출신 장교들의 씨를 말린다는 이유로 보안사령관에서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된다. 이 사건으로 강창성과 전두환의 하나회는 악연의 시작된 것이다. 

12.12를 일으킨 전두환

  박정희는 1979년 10.26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다. 10.26사건으로 국가 권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으며 권력의 중심에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있었다. 전두환은 이때 김재규를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장의 직책을 이용하여 전두환은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월권을 행사했다. 정승화는 이런 전두환의 하나회 군인들을 전출시키거나 전역시키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전두환은 12.12를 일으켜 권력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전두환의 집권욕

  1980년 전두환이 실세로 권력을 장악한 후 군 선배인 강창성을 보안사령관실로 초대하였다.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전두환은 강창성에게 3김 불가론을 말하며 집권욕을 드러냈다. 3김 불가론은 김영삼은 능력이 없고, 김대중은 믿을 수 없고, 김종필은 경솔하다는 것이다. 이에 강창성은 군인이 정치하는 것보다 민간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했다. 만약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다면 박정희 이상의 실패나 불행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전두환의 집권욕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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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축재자로 몰려 시련을 겪었던 강창성

  그해 여름 강창성은 보안사령부 서빙고실에 끌려와 부정축재자라고 몰려 모욕과 시련을 당한다. 그후 영등포의 교도소에서 삼청교육을 받았으며 2년동안 4번이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다. 삼청 교육대에 끌려가 혹독한 시간을 보내며 몸무게도 25kg이나 빠지고 당뇨병을 얻는 등 건강 또한 악화되었다. 1982년 가석방으로 출소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국회의원으로 신군부 단죄에 앞장섬

  1992년에는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2.12 국정조사위원으로 신군부를 단죄하는 데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 등 하나회 신군부 세력이 구속 수감되고, 강창성은 2004년 정계 은퇴 후 2006년 삼청교육대에서 얻은 지병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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