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인조의 선택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인조의 선택

  일본이 중국 명나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고 하며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7년간에 이어진 전쟁에 명나라는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아래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 의병들의 활약, 명의 원군 등으로 우리는 일본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한반도가 전쟁의 소용돌이로 몸살을 앓을 때 만주에서는 여진족들이 강성해져 갔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고 하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명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명나라를 공격하게 된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이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청한다. 당시 왕은 광해군으로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를 실시한다. 하지만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 세력들이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옹립한다. 후금은 자신들과 좋은 관계였던 광해군을 내쫓았다는 이유로 조선을 침략한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후금은 기병 중심의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인조를 잡으려고 단 10일만에 평양에 도착한다

형제 관계를 맺음

  인조는 재빨리 강화도로 거처를 옮긴다. 평안도에서는 의병과 관군들이 후금군에게 격렬한 저항을 한다. 후금은 현재 명과도 전쟁 중이기에 조선에서 전면전을 펼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후금은 조선에게 <우리를 형님의 나라로 모신다면 철군하겠다.>라고 말했다. 조선은 막을 힘도 없으니 당연히 형제의 맹약을 받아들이게 되고, 정묘호란은 이렇게 끝이 난다.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

  후금은 계속 강력한 나라가 되는 반면 명은 더욱 더 쇠락의 길을 걷는다. 나라가 강성해지자 2대 칸이었던 홍타이지가 국호를 후금에서 으로 바꾸고, 임금도 칸에서 황제로 칭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청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섬기라고 요구를 하였다. 계속되는 청나라의 군신관계 요구에 대해 조선은 응답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시작

  이에 청나라 홍타이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조선에 최후 통첩을 한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고 청나라를아버지의 나라로 섬기라고 한 것이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해지자 당시 조정은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게 된다. 일단 청과 좋은 관계를 맺은 후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와 명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고 군신관계는 더더욱 있을 수 없다는 척화파로 나뉘었다. 당시의 왕 인조는 척화파의 의견을 따르게 된다.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신

  조선은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각 지역의 성안에서 전투 태세를 갖춘다. 1636년 청은 각 지역의 성을 지나쳐 곧바로 한양으로 쳐들어 온다. 
  엄청나게 빠른 기동력으로 단 5일만에 서울로 진격해 온 것이다. 순식간에 쳐들어와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인조는 제일 가까운 서울 인근의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청나라가 미리 강화도 피신 길을 막아버렸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47일간의 항전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47일간 항전이 시작된다. 남한산성에 들어가서도 조정은 척화파와 주화파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척화파는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원병을 보내준 고마운 나라이므로 은혜를 잊고 배신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대표자는 김상현인데 청이 우리의 성을 파괴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으므로 이들이 청의 보급로를 끊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있는 우리 군사들이 임금을 구하러 원군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주화파의 대표자 최명길은 명나라가 고맙긴 한데 의리를 지키는 것은 사람간의 도리이지 나라 사이에는 적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임금이 살아야 백성이 살고, 백성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백성이 편안해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으니 일단 화친을 맺자고 주장했다.

조선군의 패배, 인조의 항복

  조선 군사들이 임금을 구하러 남한산성에 오기는 왔다. 하지만 청나가 기병 300명에게 조선군 4만 여명이 패배한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조선 군사들은 청군의 위용 앞에 패배를 거듭하였다. 이런 가운데 청 황제 홍타이지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게 된다. 인조와 조정 신하들은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청에 항복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에 수많은 전쟁이 있어 왔지만 한 나라의 국왕이 다른 나라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일은 인조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민족이지만 이렇게 가슴 아픈 역사도 있었다. 이런 가슴 아픈 역사를 교훈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전 국민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을 봤으면 좋겠다.

  혹시 더 알고 싶다면 영화 <남한산성>을 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나는 영화관에서 2번 봤는데 당시 백성들의 가슴 아픈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백성들이 뭔 죄가 있어서 저런 꼴을 당해야 했을까?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호란에 대해 알아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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