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고모이자 사도세자 누이인 화완옹주​​​​​​​​에 대한 영조의 사랑

정조의 고모이자 사도세자 누이인 화완옹주​​​​​​​​에 대한 영조의 사랑


화완옹주는 영조와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완옹주의 동복 오빠가 뒤주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이다. 화완옹주의 동복 언니도 5명 있었는데 첫째가 화평옹주, 다섯째가 화협옹주였고 둘째, 셋째, 넷째 언니들은 어렸을 때 사망했다.

11살 때 정치달과 결혼

화완옹주는 11살 때 이조판서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과 결혼한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관계로 3년 더 궁에 머물다가 살림을 차렸다. 영조는 첫째 딸 화평옹주를 매우 아꼈는데 화완옹주가 10살일 때 화평옹주는 출산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화완옹주가 영조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영조의 자식을 편애하였는데 영빈이씨의 소생인 화평과 화완옹주는 매우 아끼고,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는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한 화완옹주

화완옹주가 특히 애교가 있고, 머리도 뛰어나 영조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영조는 화완옹주의 사가에도 자주 들렀다. 이는 법도에 어긋난다고 신하들이 말렸으나 화완옹주를 사랑하는 영조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큰 딸 화평옹주는 생전에 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사랑받지 못하는 동생들도 아끼라고 아버지 영조에게 말을 하였다. 아버지 영조와 동생들과의 관계를 개선해 보려는 노력을 한 것이다. 

그러나 화완옹주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만 했다. 그래서 남매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사도세자의 나쁜 행동을 아버지 영조에게 고자질하기도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는 엄하게 꾸짖으며 세자수업을 시켰는데, 화완옹주에게는 늘 너그러웠다.

화완옹주 남편 정치달과 정성왕후의 같은 날에 사망

 1752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 정조가 태어난다. 화완옹주도 1756년 딸을 출산한다. 화완옹주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에 영조가 매우 기뻐하며 옹주 집으로 간다. 하지만 출산한 화완옹주 딸이 곧 죽고, 남편 정치달도 25살의 일기로 사망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정치달과 영조 정비 정성왕후가 같은 날에 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조는 당연히 정비인 정성왕후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딸 화완옹주를 위로하고자 화완옹주 집으로 갔다.

영조와 정성왕후의 관계

그렇다면 영조와 정비 정성왕후의 사이는 원래 어떠하였을까? 둘 사이는 완전 최악의 관계였다. 야사에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 첫날 밤에 정성왕후 손을 잡아보고 손이 너무 고와 왜 이렇게 곱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정성왕후가 별뜻 없이 <제가 부잣집에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영조는 그 순간 마음 속 노기가 치밀었다.

  자신의 어미인 무수리 최씨가 천민 출신이라고 모욕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무수리 최씨는 나중에 영조를 낳고 숙빈 최씨가 되는데,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손이 매우 거칠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정성왕후 조카 서덕수 때문에 정성왕후를 싫어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무슨 이유이던 간에 폐비가 될 합당한 이유가 없어 폐비가 되지 않았을 뿐, 조선의 중전 가운데 처량했던 왕비가 아닌가 싶다. 

 한편 신하들은 영조의 이런 행동에 매우 놀라고 경악하며 영조가 화완옹주 집으로 가는 것을 막았으나 영조는 화완옹주 집으로 가서 딸을 위로하고 밤이 되어서야 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법도를 깨고 화완옹주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여 살게 하였다.

  몇 달 뒤 이복언니였던 화순옹주가 사망한다. 남편 김한신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며 단식하다가 사망한 것이다. 이렇게 피붙이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화완옹주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준다.

 화완옹주는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집착을 한다. 어린 세손을 늘 돌보며 먹고 입는 것 까지 챙겼다. 그리고 옹주와 세손이라는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카와 고모라는 관계로 정조와 함께 겸상까지 했다고 한다.

화완옹주의 이런 관심은 정조와 혜경궁 홍씨도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화완옹주였기에 누구하나 나서서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의 대리청정

1775년 영조는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킨다.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므로 그의 아들 정조가 대리청정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특히 화완옹주 양자인 정후겸은 노론벽파인 홍인한, 김귀주 등과 합세하여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세손의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화완옹주 또한 영조가 아직 정정한데 왜 대리청정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반대했다.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며 숙청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자 양사에서는 정후겸과 홍인한 등을 탁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정후겸과 홍인한 등을 폐서인 시키고 유배를 보냈다. 그런데 정조를 암살하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정후겸이 죄를 받고 죽임을 당했으니 그의 어머니 화완옹주도 죄가 있다고 하며 삼사 관원들이 상소를 올린다.

화완옹주를 감싼 정조

 화완옹주의 작위를 박탈하고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총애했던 딸이었기에 화완옹주의 죄를 묻는 것은 영조의 은덕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하며 영조의 3년상 기간 동안 화완옹주를 감쌌다.

영조의 3년상이 끝나자 삼사는 또 다시 화완옹주를 벌줘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다. 국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정조는 화완옹주의 작위를 박탈하고 강화도 교동에 유배보낸다. 그후 정치달의 묘가 있는 파주로 유배지를 옮긴 후 61세가 되던 해 화완옹주는 23년의 유배생활 끝에 한양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하들은 정조 대리청정을 막으려던 역적들의 우두머리가 화완옹주인데 어찌 죄를 사하여 주느냐며 명을 거두어 줄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뜻대로 화완옹주의 유배를 풀어주었다.
순조 대에도 화완옹주를 벌줘야 한다고 했지만 순조도 듣지 않았다. 1808년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화완옹주는 순조실록에 <정처가 죽어 더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옹주 작위가 복귀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정처란 정치달의 처라는 뜻이다. 묘는 파주시 문산읍에 있는데 남편 정치달과 나란히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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