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청해진 설치, 염장의 암살

해상왕 장보고 청해진 설치, 염장의 암살


해상왕 장보고의 어릴 때 이름은 삼국사기에서는 궁복, 삼국유사에서는 궁파라고 적혀 있다. 궁은 활과 관련된 것이니 이름에 궁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활을 잘 다루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것으로 봐서 미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828년 흥덕왕 때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청해대사 궁복은 성은 장씨인데 당나라 서주에 들어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여 왕을 알현하고 졸병 1만을 이끌고 청해에 진을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기록인 번천 문집을 보면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자는 통일신라에서 서주로 와서 군중소장이 되었다. 장보고의 나이는 서른이고 정년의 나이는 열살이 젊어서 장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 했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 용맹함과 씩씩함을 비교해보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자신의 기예로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중국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가 치주, 청주, 산둥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치청왕국이라고 하며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정기가 세력을 떨치던 곳은 소금의 생산지이고 철이 많이 나서 경제력도 막강했다. 치청왕국이 당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커지자 당은 이들을 진압하려고 한다.

 당나라는 이들을 진압하는데 타민족 출신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우대하였다. 이때 많은 세력들이 치청왕국을 진압하려 오는데 그중 하나가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치청세력을 물리치며 그 능력을 당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장보고는 당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또 치청세력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 교역 능력도 알게 되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즉 이 당시 치청세력은 당, 신라, 일본 사이에서 해상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성장시켰는데 그것을 장보고가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부를 쌓게 되어 자신은 무역상으로 성공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한 것 같다.

무역상이 되려면 공부도 해야 하기에 장보고는 중국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시장조사도 하고 일본에 가서 통역사도 구한다.

청해진 설치한 장보고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흥덕왕을 만나 해적들이 신라 사람을 잡아다가 당나라로 데려가고 있으니 청해에 진을 설치해 주면 자신이 해적을 소탕하겠다고 말한다. 이건 표면적인 이유이고 청해진을 도와주면 무역을 해서 신라 재정에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흥덕왕 때에는 김헌창의 난 등으로 왕권도 약했고, 반란을 진압하면서 재정 사정도 좋지 못했다. 그런데 당에서 모은 재산으로 신라 재정에 조금 도움을 주며 청해진을 설치해주면 더 많이 재정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청해진이 설치되어 해상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삼고 해상 무역을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우선 해적들을 소탕한다. 장보고 세력이 치청세력을 진압할 정도였으니 해적소탕도 어렵지 않았다. 장보고 세력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로 해상세력으로 해적도 소탕하고 진귀한 것들도 수입해 온다. 진귀한 것을 신라 진골귀족들이 사들여 사치하는 풍습이 생기는 폐단도 있었다.

신라 하대에 가면 왕위 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었다. 흥덕왕이 자식이 없이 죽고, 흥덕왕의 사촌 동생인 김균정과 5촌 조카인 김제륭과 왕위 다툼을 벌인다. 김균정 아들 김우징은 아버지 김균정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가 실패하여 장보고 진영으로 도망가서 몸을 의탁한다.

김제륭이 희강왕이 되었으나 김명이 또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이 된다. 김우징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자신이 왕위에 오르겠다고 하며 장보고의 도움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이 된다.

장보고의 도움으로 신무왕이 된 김우징은 장보고에 감의군사로 임명하고 식읍도 지급한다. 그런데 김우징은 신무왕으로 오른지 몇 달만에 죽는다. 장보고에게 한 약속이 있는데 김우징 자신이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맞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죽어버렸으니 김우징 아들 문성왕이 장보고와의 약속을 지키려 한다.

진골 귀족들의 반대

문성왕은 우선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이란 직책을 내린다. 진해장군은 진골의 최고 반열의 지위였다. 하지만 진골 귀족들이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한다. 뿌리깊은 골품제 사회에서 미천한 출신 장보고의 딸이 왕비가 된다면 골품제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진골 귀족들이 반대하고, 장보고를 제거하기로 작정한다.

한때 장보고의 수하였던 염장을 매수해서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암살한 것이다. 믿었던 수하에게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장보고가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지 않자 청해진에서 난을 일으켜서 염장을 보내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장보고가 난을 일으켰다면 갑자기 찾아온 염장을 의심하고 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으로도 생각이 된다.

동국통감의 기록

조선 동국통감의 기록에서는 장보고가 반역했다는 것은 증거는 없고, 장보고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꾸며서 왕과 장보고를 이간 시켰는지 어찌 알겠느냐? 라고 되어 있다. 장보고의 죽음은 골품제와 관련 있다고도 말한다. 당시 신라사회에서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골품제도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 어려웠고 먹고 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로 떠났는데, 그중 한 명이 장보고가 아닌가 생각된다. 당나라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골품제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에 돌아와서는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는데 뭐가 아쉬워 정치적인 욕심도 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사람이라 권력욕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장보고의 비극적인 죽음은 김우징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인다는 김우징의 약속으로 권력욕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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