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으로 무고한 도민 희생

1945년 우리나라는 드디어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나라는 좌익, 우익으로 혼란스럽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 대립으로 서로 싸운다.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당장 끼니도 잇기 어려운 시기에 공산주의는 지주들의 땅을 공짜로 나눠준다고 꼬드긴다.

자기 땅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작농들은 땅을 공평하게 나눠준다고 하니 공산당에 가입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제주도에서도 공산주의자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선량한 국민들이었다. 

 


그런데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공산당이 설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공산당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섬이라는 특수성이 작용된 듯 하다. 미군이 들어온 후 일단 내륙의 상황을 정리하는데 바빴으므로 제주도에는 늦게 들어가게 된다. 

1946년 8월 1일 전라도 소속이던 제주도가 미군정에 의해 <도>로 승격된다. 그렇게 되니 그동안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전라도에서 지원해 줬는데 같은 도가 되어 버렸으니 지원이 끊길 수 밖에 없었다. 또 세금도 많아지고 실업률이 높았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니 제주 사람들은 <도>로 승격되는 것을 싫다고 했다.

미군정은 도로 승격되었으니 더 많은 경찰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일제시대 일본에 빌붙었던 경찰들까지도 대거 충원한다. 그러니 제주도 사람들은 미군정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다.

때는 1947년 3월 1일, 전국 여러 지역에서 3.1절 행사가 열린다. 제주 경찰 당국은 집회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제주인민위원회는 집회를 강행한다.


이날 집회를 통제하던 기마경찰이 실수로 어린아이를 다치게 한다. 이것저것 복잡한 집회 상황이라 경찰은 그냥 가버린다. 이를 본 집회 참석자들과 남로당원이 아이를 다치게 하고 그냥 가버리는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항의하면서 쫓아간다. 아이를 다치게 했으면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해줘야 하는데 왜 그냥 갔는지 모르겠다. 쫓아오는 군중들에 의해 경찰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경찰서로 피신한다.

한편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들에게 쫓겨 들어오는 경찰의 모습을 보고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오인한다. 그래서 경찰서의 경찰들이 발포를 한다. 이 발포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사망자 중에는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지 구경만 하던 학생과 젊은 엄마도 있었다. 

이 3.1발포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분노한다. 제주경찰서에 가서 발포에 대하여 진상규명과 관련 경찰들의 처벌을 요구한다. 하지만 경찰당국은 총을 들어 분노한 도민들과 대치한다. 상황이 위험해지자 제주신보 기자들이 중재로 가까스로 대치를 끝낸다.


일단 도민들은 해산하였으나 이후 경찰의 책임규명과 관련자 처벌,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자 제주도민들은 3.10 총파업과 시위에 들어간다. 이 사실이 서울에까지 알려지자 당시 경무국장이던 조병옥이 제주도에 내려온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제주도민의 사상이 불온하다며 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쓸어버릴수도 있다고 위협한다. 


제주도에는 더 많은 육지의 경찰들이 들어오고, 서북청년회도 들어온다. 서북청년회는 평안도, 황해도 등 이북출신 청년들이 조직한 반공우익단체이다. 제주도에 들어온 서북청년회 사람들은 좌익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죄없는 제주도민들까지도 잡아다가 고문을 한다. 


1948년 4월 3일 4.3사건이 일어난다. 남로당이 주도하여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정부수립, 경찰의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 중단 등을 요구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여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만들어진다. 당시 정부는 제주도만 선거를 치르지 못했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섬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하게 된다.


군대를 동원해서 토벌하려고 여수에 주둔했던 14연대에게 토벌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14연대 군인들은 왜 같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하냐며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한다.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이른바 여수 순천 사건을 일으킨다. 여순 사건을 진압한 정부는 군경, 서북청년회 등을 앞세워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선다. 

제주도 해안선에서 5km까지만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하고 그 이외의 지역이나 산악지대는 통행금지 시켰다. 이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빨갱이로 간주하여 총살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 좌익세력들은 힘이 약했으므로 산간지역에서 저항했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좌익으로 생각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통행금지령을 듣지 못해서 산악지대에 있던 사람들이나 농사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무고한 희생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제주도민 30만명 중 3만여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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