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화성 그리고 사도세자

  조선 19대 왕 숙종은 장희빈 사이에서 경종이 태어난다. 또 숙종과 무수리 숙빈 최씨 사이에서 연잉군 후에 영조가 태어난다.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왕위를 잇는다. 하지만 경종은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후사도 없었다. 경종 집권파인 소론은 늘 이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야당 격인 노론은 경종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연잉군을 차기 왕으로 점찍고 연잉군에 붙어 선다. 그리고 경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세제를 책봉하고, 경종이 몸이 편찮으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라고 간언을 한다.

경종의 사망

  경종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킨다. 소론에 의해 자신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이 다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으니 연잉군도 매우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루는 아픈 경종에게 쾌차하라는 의미로 감과 간장게장을 올린다. 그런데 이걸 먹고 경종이 사망한다.

컴플렉스가 있는 영조

  이렇게 해서 영조가 왕위에 오른다. 영조는 상당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즉위한 왕이었다. 우선 천민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점, 자신의 배다른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 노론이 만들어준 왕이라는 점이었다. 이런 컴플렉스를 이기려면 오로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학문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영조의 성격은 예민하고 깐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영조의 어진

학문에 정진한 영조

  식사는 채식 위주로 삼시세끼를 잘 챙겨 먹고 늘 학문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한다. 이런 영조에게 둘째 아들로 사도세자가 태어난다. 정빈 이씨 소생의 효장세자가 있었으나 10살 무렵에 일찍 사망한다. 영조 나이 41살에 영빈 이씨에게서 사도세자가 태어난다. 영조의 늦둥이 아들이 태어났으니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사도세자 세자 책봉과 동궁전, 비극의 씨앗

  사도세자는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에 오른다. 조선 역대 최연소 세자책봉이다. 세자가 책봉되면 세자는 동궁전에 기거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부모의 손을 떠나게 된다. 젖먹이 자식일수록 어머니의 정이 있어야 하는데 떼어놓았으니 그것이 큰 문제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키워줄 사람으로 경종 때의 궁녀들을 보모로 삼는다. 경종 때 궁녀들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무술도 가르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보면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하여 동궁전에 보낸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고 적고 있다.

부자 간의 갈등

 영조의 기대와는 다르게 문보다는 무술에 빠지게 된 사도세자를 영조는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부자간의 갈등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더욱 더 사이가 멀어지는 일은 세자 대리청정이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14년 동안 부자 간 완전히 사이가 나빠진다. 

창경궁 문경전, 임오화변의 장소

  사도세자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데 어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면 영조는 그런 것 하나 처리 못하고 나에게 물어본다고 역정을 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어떤 일에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면 영조는 네가 왕이냐고 하면서 화를 버럭 냈다. 물어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해도 화를 내고, 알아서 처리해도 화를 내는 영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이다.

임오화변, 사도세자의 죽음

  아버지 영조를 만나기 위해서는 청심환을 먹어야 할 정도로 심신은 약해져 갔다. 그러다가 찾아온 정신병은 더욱 더 사도세자를 난관으로 빠뜨렸다. 나인들이 옷을 가져다 주면 이 옷을 입고 아버지 영조를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에 옷을 입으면 안된다는 의대증이 생겼다. 그러다가 옷을 가져다 주는 궁녀들이나 내관들을 칼로 해치기까지 한다.

사도세자(장조) 무덤 융릉

  나중에는 내가 아버지 영조를 칼로 해치우고 싶다는 말까지 하게 된다. 이 말을 영조에게 전해준 이가 바로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였다. 결국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게 된다. 

정조의 계획도시 화성

  아버지 영조가 직접 뒤주에 못을 박아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다. 그 장면을 똑똑히 본 사람이 바로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계획 도시 화성을 만들었다. 그리고 화성 행차를 꾸준하게 하였다. 이런 화성 행차의 모습은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반차도를 보면 약 1800여명의 사람들이 화성행차에 함께 한다. 중앙 관료들, 궁중 나인, 왕을 상징한느 의장물을 든 군사들, 악대 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림에는 약 1,800여명이지만 실제로는 약 6,000여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현지에 먼저 가서 경호를 하거나, 중간에 지원 역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여 6,000여명 인 것이다.

화성 행차 이유

  정조는 1789년 아버지 묘를 화성으로 이장하였다. 이장 후 매년 화성으로 행차하여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렸다. 당시에는 교통도 불편하고 임금이 한양 땅을 떠나 화성으로 행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효성, 또 정치적인 생각으로 화성을 자주 찾았던 것 같다. 화성을 행차하면서 백성들의 소리를 직접 듣기도 하고, 지역의 민심과 사정을 알아보기도 했다.

  정조가 행차한 지역에서 특별 과거 시험도 실시하여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기도 했다. 또 화성까지 가려면 많은 군사들이 정조를 호위하게 된다. 그래서 한양 주변의 군사방위를 점검하기도 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기회로 활용하곤 했다.

화성능행도

화성능행도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는 특별히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바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사도세자 묘소를 찾은 것이다. 아버지 묘소를 참배한 후에는 화성에서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열었다. 이번 행차는 아버지 묘소도 참배하고 어머니 회갑도 축하하는 자리였기에 지역의 노인들도 초대하여 잔치를 열었다. 어머니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화성에 행차한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모습은 화성능행도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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