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 그리고 씨없는 수박
- 역사공부
- 2021. 3. 1. 12:27
우장춘 박사 그리고 씨없는 수박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견제하려고 친러 정책을 폈던 명성황후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된다. 일본은 여우사냥으로 명명된 조선 왕비 시해 작전을 위해 음모를 꾸민다. 시해는 일본 낭인들이 맡고, 외관 상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을미사변과 우범선
조선 왕비 시해를 주도했던 일본인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였다. 일부 친일 조선 사람들을 끌여 들여서 조선인 훈련대 반란으로 꾸미려고 했다. 대표적 인물이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었다. 우범선은 조선에 불만을 품고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왕비 시해 작전을 하기 전 우범선은 여러가지 결정적인 정보를 일본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시해 당일 날에도 경복궁 길 안내를 도운 이도 바로 우범선이었다. 궁을 지켜야하는 대대장이 길을 안내하였으니 일본의 작전은 쉽게 진행되었다.
일본은 그렇게 쉽게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로 태워버렸다. 일설에는 시체를 태워 처리한 사람이 우범선이라고도 한다. 아무리 명성황후가 매관매직하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죽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리고 이를 도운 이가 조선인 우범선이라는 사실은 더욱 참담함이 느껴진다.
일본으로 건너간 우범선
우범선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데 그 사람이 바로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이다. 하지만 우범선은 조선 왕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찾아온 옛 동료 고영근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당한다.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한 우장춘 박사
우장춘은 매국노 아버지를 두어 일본에서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아닌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일본인들의 갖은 차별을 받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를 극복하고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농림성에 취직한다.
1936년 그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즉 다른 종끼리 교배하면 새로운 종이 나온다는 이론이었다. 이 논문은 당시 육종학계에 큰 이슈가 되었고, 유전학에서도 인정을 받는 뛰어난 논문이었다.
이후 조선이 해방되었으나 심각한 식량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가장 필요한 인물이 농학박사 우장춘이었다. 한국 정부가 우장춘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한국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남은 여생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일할 것을 다짐을 한다.
한국에 들어온 우장춘 박사
한국에 들어온 우장춘 박사는 농업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다.
배추와 무의 종자 개량, 제주도에서 귤을 대량 재배할 수 있는 기술 개발, 강원도에 알맞는 감자 보급, 우리 농토에 맞는 벼 품종 개량 등 열악한 우리나라 농업 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다. 당시 채소 종잔느 일본에 거의 의존했는데 우장춘 박사의 노력으로 자급할 수 있게 되었다.
씨없는 수박을 소개한 우장춘 박사
우장춘 박사하면 씨없는 수박이다. 하지만 씨없는 수박은 일본 교토대의 기하라 히토시가 만든 것이고, 우리나라에 소개한 사람이 우장춘 박사라고 한다. 일본에 계속 있었다면 아주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을텐데 반역자 아버지 우범선을 속죄하면서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우장춘 박사의 삶이 참 존경스럽다.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
1959년 8월 10일에 사망하였는데 사망 3일 전 8월 7일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수여되었다. 이때 우장춘 박사는 조국이 자신을 인정했다고 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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