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개혁 도학정치
- 역사공부
- 2021. 3. 15. 23:02
조광조의 개혁 도학정치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은 12년간 폭압적인 정치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연산군을 쫓아낸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많은 선비들을 죽게 만들었고, 백성들의 삶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 박원종, 성희안은 유순정, 신윤무 등과 더불어 거사를 성공하여 진성대군을 옹립하니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연산군의 폭정에 들고 일어난 반정으로 갑자기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중종은 즉위 초 반정 공신들에 의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으나, 연산군 시대의 잘못된 점을 고쳐 나갔다.
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선비들의 한을 풀어주고 성균관을 학문을 공부하는 곳으로 다시 만들었다. 반정 핵심인물인 박원종과 성희안이 차례로 죽자 서서히 왕권을 안정시켜 가면서 1515년에 조광조를 발탁한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 성리학의 근본을 배워 공부에 몰두했다. 이렇게 학문에 정진하여 20대 중반에는 이미 성리학을 통달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도 전에 학자로 이름을 먼저 날린 셈이다.
1515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하여 중앙 정치에 진출하였는데 첫 관직이 정6품 성균관 전적이었다. 파격적인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후 3년 만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조광조는 도학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덕과 예를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정치였다. 또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관리를 추천하는 현량과를 실시하였고, 조선을 유교적 이상사회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삐걱댄다. 이상을 앞세운 개혁을 하다보니 중종을 옹립한 세력들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자신을 후원하던 중종과도 마찰을 빚기도 했다.
1518년 미신숭배라고 해서 소격서를 폐지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종은 세종이나 성종처럼 훌륭한 왕들도 폐지하지 않았는데, 중종 자신이 폐지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광조의 사림파는 중종을 압박해서 결국 소격서를 폐지시킨다.
여기에 더해 1519년에는 위훈삭제 사건도 일으킨다. 중종반정 이후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들 중 공이 없는데도 공신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조광조의 사림파는 중종의 권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명분을 앞세워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다. 이런 급진적 개혁은 중종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위훈 삭제 대상인 훈구파들도 칼을 갈고 있었다.
훈구파는 드디어 사림파 제거라는 행동을 옮겼다. 홍경주와 남곤 등은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어지럽히게 만든다고 하며 탄핵했다. 중종은 조광조 등을 옥에 가두고 전남 화순군 능주로 귀양 보내고 사약도 보냈다.
중종 입장에서는 도학정치도 좋지만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조광조 일파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약까지 보내야 했던 점은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학문을 연구하고 유교적 이상사회를 만들었다면 조선 중기 보다 더 강력한 조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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