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차별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
- 이모저모
- 2021. 9. 22. 07:37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에 일어나 1906년에 마무리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이 진행되는 12년 동안 프랑스는 극심한 분열을 맞는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들끼지 친드레퓌스파, 반드레퓌스파로 나뉘어 다툼이 벌어진다. 심지어 가족간에도 의견이 갈라져 드레퓌스가 무죄냐 유죄냐를 두고 언쟁이 벌어진다. 결국 1995년에야 프랑스 정부는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무죄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드레퓌스 사건이란
그럼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이란 무엇인가?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프랑스 포병 대위로 근무했다. 그런데 1894년 프랑스 파리에 있던 독일 대사관의 쓰레기통에서 청소부가 기밀 내용이 담긴 종이를 발견한다. 프랑스 장교 한 명이 독일에게 포섭되어 돈을 받고 군사기밀을 팔았다는 내용이 담긴 종이였다. 종이 한 곳에는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사람으로 추측되는 영문 D자가 적혀 있었다.
프랑스 군 수사당국은 수사를 하면서 드레퓌스가 범인이라고 단정했다. 드레퓌스는 독일계 알자스주 출신이고, 유대인이며, 이름이 D자로 시작된다고 해서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몰았다. 당시 프랑스는 1870년 독일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독일인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다. 또 유대인을 혐오하고 있어 군 수사당국은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사람을 드레퓌스라고 밀어 붙였다.
1894년 드레퓌스 재판
1894년 10월 15일 프랑스 군사법정에서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변호인도 없고 비공개로 진행된 이 재판에서 군 수사당국은 조작된 증거를 들이 밀며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국민들에게도 반유대정서 감정을 부추겼다. 결국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사병으로 강등당한다.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억울한 처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백방으로 무죄를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1896년 군 비밀정보 국장에 피카르 소령이 부임한다. 어느 날 페르디낭 발진 에스테르하지 소령의 뇌물죄를 조사하다가 그가 돈에 쪼들린 나머지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임을 자백 받는다. 피카르 소령은 수사 결과를 즉각 상부에 보고하고, 드레퓌스가 무죄이니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군 수사 당국과 군 수뇌부는 자신들의 잘못된 수사가 드러나 맹비난 받을 것을 염려해 피카르 소령의 요구를 묵살한다. 그리고 피카르 소령을 알제리로 쫓아 보낸다. 이 사실은 드레퓌스 동생 마투는 진범인 페르디낭 발진 에스테르하지 소령을 고발했고, 피카르 소령도 다시 수사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대통령에게 보낸다.
이런 사실이 프랑스 우익과 좌익진보 세력에게 알려진다. 우익 세력은 재심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만약 재심이 열리면 드레퓌스는 무죄가 되어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 하고 군복을 벗어야 하며 정권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좌익 진보세력은 프랑스의 양심은 죽었다고 하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죄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서는 안된다며 재심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프랑스 국민들도 둘로 나뉘어 드레퓌스가 범인이다 아니다를 두고 극렬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진범 에스테르하지가 체포되어 가두었지만 1898년 1월 11일 몰래 석방한 후 영국으로 도망치게 했다. 이런 사실에 프랑스 지식인들은 더욱 분노한다.
나는 고발한다-에밀 졸라
에스테르하지가 영국으로 줄행랑 친 이틀 후 에밀 졸라는 문학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싣고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프랑스 당국의 비열함을 맹비난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인종차별이고, 불법체포, 감금, 증거조작 등이 국가범죄라고 강력한 비난을 한다. 이 글은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쳐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전 국민들이 논쟁을 펼쳤다.
결국 여론에 견디지 못한 군사 법정은 드레퓌스 사건을 재 조사하고 재판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열린 군사 재판에서도 드레퓌스를 포섭하여 종신형을 10년형으로 감형을 제시한다. 그동안 많은 고통의 세월을 보낸 드레퓌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10년형을 받아 들인다.
1902년 좌파가 집권하게 되자 드레퓌스 사건을 재조사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6년 다시 군사재판이 열려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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