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간 사람들
- 이모저모
- 2021. 2. 17. 08:33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간 사람들
1950년 한국 전쟁 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최빈국 중 하나였다. 미국에서 무상 원조로 간신히 연명하며 살아가던 시대였다. 그런데 미국이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정책을 바꾼다. 유상 원조를 받으려면 돈을 갚을 수 있도록 경제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1963년은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1억달러 미만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차관을 들여와야했다. 우리나라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미국은 돈을 갚을 수 없는 계획이라고 판단해서 차관 요청을 거부했다.
이때 서독을 새로운 외화 획득의 대안으로 봤다. 당시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울 만큼 경제가 활성화 되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서독의 막장에서 일할 서독행 광부 모집을 하였다. 20~35살의 젊은 사람들만 지원할 수 있었다. 60kg의 모래주머니를 들 수 있어야 합격이었다. 또 달리기, 턱걸이, 역기 들기 등의 체력 검사를 통과해야 서독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열악한 작업환경
파독광부들은 갱내에서 갱도를 받치는 기둥을 설치해야 했다. 그 기둥을 동발이라고 하는데 약 60kg이 넘었다고 한다. 갱도 내의 높이도 낮아서 제대로 서서 일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또 갱도 내의 기온도 높아서 조금만 일해도 작업복은 땀으로 금방 젖어 버렸다. 엄청 열악한 환경에서 기어다니며 일을 했기 때문에 다치는 경우도 많았다.
작업 도중에 돌아가신 분은 26명,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도 17명이 되었다. 이렇게 사망자가 많았음에도 우리나라에서 모집할 때는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우리나라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월급
파독 간호사들의 당시 월급은 최고 800마르크로 약 65,000원이었다. 파독 광부들의 월급은 160달러 정도로 약 5~6만원 정도였다. 당시 9급 공무원들의 월급이 4천원 정도였고, 장관들의 월급도 약 52,000원이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서독에 가려고 지원을 한 것이다.
파독 간호사들도 광부들처럼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시체를 닦는 일을 하였고 간병인처럼 병원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경제개발이 원동력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월급은 대부분 우리나라로 송금되어 가족들이 먹고 사는데 쓰이고, 경제 개발에 쓰이는 밑거름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방문 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미안하다고 했다. 여러분들을 이런 곳에까지 와서 일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의 자손들에게는 이런 불행을 겪지 않게 하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자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방문과 애국가의 울림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여 바다를 이루었다.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경제 발전을 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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