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 서인 남인 등 조선의 붕당정치 조선 중기 때부터 정치 운영 형태는 붕당정치이다. 붕당정치는 학연을 바탕으로 형성된 여론인 공론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간다. 즉 학문적 생각이나 정치적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붕당이라고 한다. 조선 13대 왕 명종은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어린 나이에 죽어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3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는 바로 1552년 즉위한 14대왕 선조이다. 선조가 즉위했을 당시는 그 동안 권력을 휘둘렀던 훈구 세력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선조는 사림파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림들은 앞선 왕대에 외척들의 척신정치의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보였다. 그리고 이조전랑이라는 벼슬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
계백과 의자왕, 백제 멸망 원인은? 백제는 의자왕이 왕위에 올라 신라 성을 40여개 빼앗았다. 이에 신라의 김춘추는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이 수모를 갚을까? 라는 생각에 당나라에 협상을 하러 간다. 당의 황제 태종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보복을 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춘추가 와서 나당 연합군을 조직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친다는 제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당나라는 혼자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 보다 누군가 도와주면 훨씬 수월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신라가 도와준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웠을까? 백제와 당 외교 백제도 나름대로 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외교를 잘해왔다.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칠 때 금칠 갑옷을 선물로 줄만큼 당과 친선을 맺고자 노력해 왔다. 당의 입장에서..
왕의 호칭 조 종 군 왕은 살아 생전에 자신의 호칭을 알 수 없다. 돌아가셔야만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데 이때 붙이는 이름을 묘호라고 한다. 예를 들면 세종이라고 하면 종묘에 모실 때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원래는 국가를 처음 창업한 왕에게만 의 호칭을 사용했다. 고려시대를 보면 고려를 창업한 왕건만 라고 불리웠고 나머지 임금은 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가 많아졌다. 왜냐하면 보다 가 더 위상과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칭 세조부터 시작 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한 왕은 이다. 세조 스스로 명명한 것이 아니라 예종, 한명회, 정인지 등이 란 호칭을 사용했다.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들이 세조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자신들의 권위와 위상도 높아진다고 생각하여 라고 칭한 것이다. 선조 인조 ..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한 고종 한 나라의 국모를 무참하게 살해한 일본 칼잡이들은 누구일까? 일본이 말하는대로 일반 깡패 낭인 집단이 우발적으로 명성황후를 살해했을까? 그건 절대 아니다. 그럼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일본 엘리트 집단이며 우익세력으로 구성된 사람들이다. 조선이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고 하자 이에 압박을 느낀 일본이 철저하게 계획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범죄인들에 대한 처벌은? 그럼 한 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범죄인들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히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 했다. 세계 사람들도 조선에서 국모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의 시선이 두려웠는지 몰라도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미우라 공사..
김부식 김돈중 묘청 정중부 수염 무신정권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은 고려 중기 정치가이자 유학자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문신이었지만 중앙 권력층과는 관련 없는 문벌귀족이었다. 그러나 김부식의 4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으로 진출한다. 4형제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중앙에서 힘을 발휘하는 집안이 된다. 당대에는 이자겸이 최고 권력자였는데 그 다음인 권력자 집안이 된 것이다. 이자겸과는 경쟁하지 않고 협력하며 중앙 권력층의 핵심으로 승진해 나간다.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은 왕보다 더한 권력으로 고려의 모든 것을 장악한다. 하지만 이자겸은 충직한 부하였던 척준경에게 제거되었다. 조정은 잠시 척준경이 권력을 잡고 휘둘렀지만 척준경도 정지상에 의해 탄핵되어 제거된다. 그리고 고려 조정은 정지상..
덕만공주 선덕여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에서 선물로 보내 온 꽃 그림을 보고 나비가 없으니 이 꽃을 심어도 향기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선덕여왕이 어떻게 우리나라 최초로 여왕이 될 수 있었을까? 당시 왕의 자손으로는 성골 계층의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인 경우이고, 진골은 부모 중 한 명이 왕족인 경우이다. 진흥왕의 아들들 신라 전성기를 이끈 24대 진흥왕의 아들은 동륜과 진지왕이다. 동륜은 일찍 죽고, 25대 진지왕은 상당히 문란한 생활을 하였다. 결국 진지왕은 쫓겨난다. 진지왕의 아들이었던 용춘은 왕이 되지 못하고,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26대 왕으로 등극한다. 동륜에게는 진평왕 외에도 아들 백반, 국반이 있었다. 진평왕의 딸이 27대 선덕여왕, 국반..
고려 무신정권 이의민 고려시대의 무술은 수박이라고 불리웠고, 무술대회가 자주 열렸다. 수박은 맨손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로 오늘날 택견에 해당된다. 이의민은 경주에서 수박대회에 참여하곤 했다. 이때 이의민의 실력을 눈여겨 보던 사람이 있었는데 경상도 안찰사 김자양이었다. 하지만 이의민의 아버지는 소금장수였고, 어미는 천한 노비출신이었다. 하루는 이의민과 형이 주막에서 양반들과 다툼이 있었다. 그 일로 이의민과 그의 형은 관아로 끌려가 모진 매를 맞는다. 이의민을 극진히 아꼈던 형은 이의민을 살려달라고 읍소하여 매를 대신 맞고 죽는다. 안찰사 김자양은 이의민을 죽이기는 아까워 고려시대 수도경비를 담당한 국왕 직속부대인 경군으로 추천한다. 그렇게 경군이 되었지만 천한 출신이 출세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명성황후 민비가 무당에게 군호 내려, 무녀 진령군 명성황후 민비와 민씨 일가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1882년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만들어졌다. 별기군은 양반자제로 구성되어 있어 그들의 사병과 다를 바 없었다. 새로 생긴 별기군은 혜택을 받았으나, 원래 있던 구식 군대들은 찬밥 신세였다. 월급이 13개월이나 나오지 않았고, 그나마 한달 치로 받은 쌀에는 모래나 썩은 쌀이 들어 있었다. 구식군대의 반발 임오군란 구식 군대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민비 일파들을 몰아내고자 무기를 들었다. 이것이 바로 임오군란이다. 임오군란이 발생되자 민비는 재빨리 궁녀의 복장으로 궁을 빠져나가 충주로 피신을 갔다. 충주 은신처에서 숨죽이며 지내고 있을즈음 어떤 무녀가 민비를 찾아온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은신처에..
롬멜의 백전백승 전술, 롬멜의 리더십, 롬멜의 고지전 승리요인 세계 제1차대전 당시 에르빈 롬멜은 독일군 중위 계급을 달고 전쟁터에 나간다. 참전 후 롬멜은 병사들의 급식을 담당하는 보직을 맡았다. 식사 준비를 해서 말 마차에 실어 전선에 보급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땅이 진흙탕이라서 이동하기 쉽지 않았다. 전선에 도착하여 배식하려고 했는데 이미 장교들이 다 전사한 후였다. 군사들을 지휘할 장교가 다 죽었으니 상부에서는 롬멜을 중대장으로 임명한다. 얼떨결에 중대장이 되었지만 그곳은 매우 위험한 지역이라서 죽을 각오로 중대장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중대장이 된 롬멜은 그날 적진에 들어가 적 후방까지 침투에 성공한다. 아주 적은 3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적진에 들어가 적의 중대를 쓸어 버린 것이다. 상부에서는..
로마 교황청 근위대가 스위스 용병인 이유, 루이16세 마이 앙투아네트 스위스는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나라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를 찾는다. 하지만 예전에는 산지가 전 국토의 70%, 호수는 5%로 되어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전 국토의 25%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산지와 호수의 영향으로 냉해가 심해서 농사가 잘 되지 않는 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스위스는 유럽에서도 가장 못사는 나라 중의 하나였다. 먹을 것을 찾아 살길을 찾아 스위스 젊은이들은 스위스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들이 찾은 일자리 중 하나는 용병이었다. 용병이란 봉급을 주며 군인으로 쓰기 위해 고용된 병사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끝까지 항전했다. 스위스 용병의 활약 상을 예를 들어 보겠다. ..
1919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의 주도로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어 3월 4일에는 평안남도 강서, 3월 16일 경남 합천 등 전국 각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난다. 경기도 화성에서도 송산, 향남, 장안 우정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장날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에 만세운동을 벌인 것이다. 평화적인 만세 운동에 일본은 총을 앞세워 주민들 46명을 죽이고, 4백 여명을 연행하여 고통스런 고문까지 가했다. 일제의 이런 만행에 주민들은 너무나도 분개하여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했다. 그리고 성난 군중들은 일본 순사까지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조선인 순사 조희창의 꼬임 이에 일본은 화성을 눈여겨 보게 된다. 그러다가 4월 15일 화성 제암리에 일본군들이 들이닥친다. ..
정조의 고모이자 사도세자 누이인 화완옹주에 대한 영조의 사랑 화완옹주는 영조와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완옹주의 동복 오빠가 뒤주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이다. 화완옹주의 동복 언니도 5명 있었는데 첫째가 화평옹주, 다섯째가 화협옹주였고 둘째, 셋째, 넷째 언니들은 어렸을 때 사망했다. 11살 때 정치달과 결혼 화완옹주는 11살 때 이조판서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과 결혼한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관계로 3년 더 궁에 머물다가 살림을 차렸다. 영조는 첫째 딸 화평옹주를 매우 아꼈는데 화완옹주가 10살일 때 화평옹주는 출산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화완옹주가 영조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영조의 자식을 편애하였는데 영빈이씨의 소생인 화평과 화완옹주는 매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