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청해진 설치, 염장의 암살 해상왕 장보고의 어릴 때 이름은 삼국사기에서는 궁복, 삼국유사에서는 궁파라고 적혀 있다. 궁은 활과 관련된 것이니 이름에 궁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활을 잘 다루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것으로 봐서 미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828년 흥덕왕 때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청해대사 궁복은 성은 장씨인데 당나라 서주에 들어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여 왕을 알현하고 졸병 1만을 이끌고 청해에 진을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기록인 번천 문집을 보면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중국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가 치주, 청주, 산둥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치..
역관 홍순언과 석정의 부인의 인연, 종계변무 해결로 광국공신 역관 홍순언은 조선 사신 일행으로 명나라 사행길을 떠났다. 사행길에서 역관은 보수도 거의 없으니 사무역을 통해 이익을 챙기곤 했다. 하루는 임무도 마치고 호기를 부릴 겸 유곽에 가서 술을 먹게 된다. 그런데 어떤 기생이 자기 몸값을 터무니 없이 높게 부른 여인이 있었다. 홍순언이 의아하여 그녀를 부르니 소복을 입은 채로 홍순언 앞으로 왔다. 아니 왜 이런 옷을 입고 왔을까 하고 물어봤다. 어느 기생과의 만남 그러자 그 기생은 자신은 관리인 아버지와 유복하게 자랐는데 돌림병으로 부모님도 죽고 간신들에 의해 재산도 몰수 당해 부모 장례 치를 돈도 없어 기생집에 스스로 나왔다는 것이다. 또 자신을 사줄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니 자신을 함부로 하지..
1945년 우리나라는 드디어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나라는 좌익, 우익으로 혼란스럽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 대립으로 서로 싸운다.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당장 끼니도 잇기 어려운 시기에 공산주의는 지주들의 땅을 공짜로 나눠준다고 꼬드긴다. 자기 땅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작농들은 땅을 공평하게 나눠준다고 하니 공산당에 가입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제주도에서도 공산주의자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선량한 국민들이었다. 그런데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공산당이 설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공산당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섬이라는 특수성이 작용된 듯 하다. 미군이 들어온 후 일단 내륙의 상황을 정리하는데 바빴으므로 제주도에는 늦게 들어가게 된다. 194..
조광조의 개혁 도학정치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은 12년간 폭압적인 정치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연산군을 쫓아낸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많은 선비들을 죽게 만들었고, 백성들의 삶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 박원종, 성희안은 유순정, 신윤무 등과 더불어 거사를 성공하여 진성대군을 옹립하니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연산군의 폭정에 들고 일어난 반정으로 갑자기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중종은 즉위 초 반정 공신들에 의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으나, 연산군 시대의 잘못된 점을 고쳐 나갔다. 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선비들의 한을 풀어주고 성균관을 학문을 공부하는 곳으로 다시 만들었다. 반정 핵심인물인 박원종과 성희안이 차례로 죽자 서서히 왕권을 안정시켜..
황윤길과 김성일, 서로 다른 주장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이 사절단으로 일본의 정세를 알아보려 파견되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범할 것이라는 소문에서 일본 정세를 파악하러 간 것이다. 두 사람은 일본을 갔다 와서 서로 상반된 주장을 내세운다. 선조는 일본이 정말 우리나라를 침입해 올 것 같냐고 물어 봤다. 황윤길은 토요토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니 반드시 조선을 침입해 올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토요토미는 별로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조선은 두 사람의 의견에 조선 조정도 두 편으로 나뉘어 언쟁을 벌인다. 결국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입해 오지 않는다는 김성일의 의견을 수용한다. 조선 조정은 앞으로 다가올 임진왜란에 ..
우장춘 박사 그리고 씨없는 수박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견제하려고 친러 정책을 폈던 명성황후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된다. 일본은 여우사냥으로 명명된 조선 왕비 시해 작전을 위해 음모를 꾸민다. 시해는 일본 낭인들이 맡고, 외관 상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을미사변과 우범선 조선 왕비 시해를 주도했던 일본인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였다. 일부 친일 조선 사람들을 끌여 들여서 조선인 훈련대 반란으로 꾸미려고 했다. 대표적 인물이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었다. 우범선은 조선에 불만을 품고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왕비 시해 작전을 하기 전 우범선은 여러가지 결정적인 정보를 일본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시해 당일 ..
봉림대군 효종의 북벌론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 1649년 인조가 죽자 봉림대군은 왕위에 올라 17대 왕 효종이 된다. 아버지 인조 때 청나라의 침입으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으나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고 만다. 머리를 청나라 황제에게 조아리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많은 고생을 한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청나라에 끌려온 뒤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온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하려고 노력했다. 또 청나라에 있으면서 서양의 훌륭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다짐을 했다.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청나라에서 오랜 볼모생활을 마치고 ..
조선 19대 왕 숙종은 장희빈 사이에서 경종이 태어난다. 또 숙종과 무수리 숙빈 최씨 사이에서 연잉군 후에 영조가 태어난다.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왕위를 잇는다. 하지만 경종은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후사도 없었다. 경종 집권파인 소론은 늘 이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야당 격인 노론은 경종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연잉군을 차기 왕으로 점찍고 연잉군에 붙어 선다. 그리고 경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세제를 책봉하고, 경종이 몸이 편찮으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라고 간언을 한다. 경종의 사망 경종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킨다. 소론에 의해 자신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이 다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으니 연잉군도 매우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루는 아픈 경종에게 쾌차하라는 의미로 감과 간장게장을 ..
4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내용 관학파는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세력을 말한다. 관학파는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진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 계유정난인데 수양대군의 행동을 지지한 세력이 훈구파이다. 그런데 훈구파가 정권을 잡은 이후 관학파의 정신을 점점 잊고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는 일이 많았다. 이런 훈구파의 도덕적 타락과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재야의 세력들이 중앙 권력에 도전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사림파이다. 성종은 사림파들을 등용하여 3사(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에서 일하게 하였으며 이들은 훈구파들이 잘못하는 일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이때에는 훈구파와 사림파는 큰 문제없이 넘어간다. 하지만 연산군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문제가 달라진다. 연산..
고조선 단군신화 8조법 부여의 법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BC 2333년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이다. 최초의 군장국가이며, 건국 이념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이다. 고조선 건국이야기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쓰여 있다. 예전 시험 문제를 보면 단군신화와 관련이 먼 것을 고르라는 문제에 삼국사기가 보기로 나오기도 했다. 단군신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천제의 아들 환웅이 내려왔다고 했다. 이는 우리 민족이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엿볼 수 있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농업 중심의 사회임을 알 수 있다. 홍익인간 이념으로 다스렸다는 것은 백성이 근본이라는 사상을 알 수 있다. 곰이 웅녀로 변해 혼인하여 ..
노인동맹단 강우규 의사 사이토에게 폭탄 투척 단두대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백발의 우국지사 강우규 백발의 우국지사인 강우규가 남긴 시이다. 강우규는 평안남도 덕천 출신으로 친형에게 배운 한학과 한방 의술을 바탕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교육사업에 뜻을 두었으며 이동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이를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홍원에 영명학교를 세우고 교회도 세웠다. 하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북간도로 이주하여 의술을 베풀고 조선의 독립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1915년에 중국 지린성 요하현에서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을 건설했다. 1917년에는 동광학교를 세워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노인동맹단 활..
김재규 차지철의 관계 차지철은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용하도록 추천한 인물이다. 차지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술과 여자를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이라며 추천한 것이다. 이렇게 경호실장으로 발탁된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를 밀어내고 권력 2인자가 된다. 5.16 쿠데타 시절 차지철은 대위 경호실장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를 화나게 하는 월권행위가 많았다. 5.16 군사쿠데타 시 차지철 계급은 대위, 김재규는 준장이었다. 그런데 경호실장이 되고 나서는 김재규를 김부장이라고 하대하며 부르는 것이 상당히 기분 나빴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치적인 문제는 주로 중앙정보부에서 다루었는데, 차지철의 경호실이 정치문제까지 개입하게 된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에 정치 공작을 지시하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