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365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켜 낸 김영환 장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켜 낸 김영환 장군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고려인들의 뛰어난 목판인쇄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팔만대장경을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의 필체라고 극찬했다. 현재에도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에는 인민군들이 스며 들어 하마터면 팔만대장경이 없어질 뻔 했다. 당시 김영환 장군이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가야산을 폭격하라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8월 당시 공군 대령인 김영환 장군에게 인민군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가야산을 폭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인민군 빨치산의 은둔지를 폭격하여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김영환 장군은 편대를 이끌고 가야산으로 날.. 2021. 6. 24. 국군포로 장무환 일병 45년만에 귀환 국군포로 장무환 일병 45년만에 귀환 1948년 장무환씨는 국방경비대로 국군에 입대한다. 이당시는 모병제라 배고픔과 경제적 어려움에 군대에 입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무환도 이렇게 입대를 희망하여 국방경비대에 들어갔으나 폐에 문제가 생겨 8개월만에 의병 제대를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장무환은 또 다시 입대한다. 이번에는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에 입대한다. 장무환의 고향 경북 울진까지 인민군들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장무환은 인민의용군에 편성된다. 전쟁 속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금강산까지 끌려간다. 그런데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도망을 가 고향 울진으로 돌아온다. 수백 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도망온 것이다. 1952년 11월 또 장무환은 입대 영장이 나와 또 .. 2021. 6. 1. 제주4.3사건으로 무고한 도민 희생 1945년 우리나라는 드디어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나라는 좌익, 우익으로 혼란스럽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 대립으로 서로 싸운다.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당장 끼니도 잇기 어려운 시기에 공산주의는 지주들의 땅을 공짜로 나눠준다고 꼬드긴다. 자기 땅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작농들은 땅을 공평하게 나눠준다고 하니 공산당에 가입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제주도에서도 공산주의자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선량한 국민들이었다. 그런데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공산당이 설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공산당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섬이라는 특수성이 작용된 듯 하다. 미군이 들어온 후 일단 내륙의 상황을 정리하는데 바빴으므로 제주도에는 늦게 들어가게 된다. 194.. 2021. 4. 3.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처음으로 알린 사람은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였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1명이 쇼크사했다는 사회면의 짧은 기사를 썼다.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 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중이라고 적었다.그러니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구타나 고문 등을 연상될 수 있는 기사였다. 박군은 서울대 운동권 학생이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라고도 적었다. 이러니 시국사범임을 생각할 수 있는 기사였다. 이 짧은 기사가 나가자 기자들과 사람들은 경찰들의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경찰은 치니 하고 죽었다고 발표를 했다. 윤상삼 기자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처음 확인했던 의사의 목격담을 기사를 보도했다. 경찰들은 고문으로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박종철 군.. 2021. 3. 29. 이전 1 ··· 82 83 84 85 86 87 88 ··· 9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