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47 역관 홍순언과 석정의 부인의 인연, 종계변무 해결로 광국공신 역관 홍순언과 석정의 부인의 인연, 종계변무 해결로 광국공신 역관 홍순언은 조선 사신 일행으로 명나라 사행길을 떠났다. 사행길에서 역관은 보수도 거의 없으니 사무역을 통해 이익을 챙기곤 했다. 하루는 임무도 마치고 호기를 부릴 겸 유곽에 가서 술을 먹게 된다. 그런데 어떤 기생이 자기 몸값을 터무니 없이 높게 부른 여인이 있었다. 홍순언이 의아하여 그녀를 부르니 소복을 입은 채로 홍순언 앞으로 왔다. 아니 왜 이런 옷을 입고 왔을까 하고 물어봤다. 어느 기생과의 만남 그러자 그 기생은 자신은 관리인 아버지와 유복하게 자랐는데 돌림병으로 부모님도 죽고 간신들에 의해 재산도 몰수 당해 부모 장례 치를 돈도 없어 기생집에 스스로 나왔다는 것이다. 또 자신을 사줄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니 자신을 함부로 하지.. 2021. 6. 29. 이황 이이 조식의 교육방법과 학문적 사상 이황 이이 조식의 교육방법과 학문적 사상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교육방법 퇴계 이황은 주자의 철학을 계승해 인간과 만물의 근원을 이와 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와 기는 확실하게 구분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이 이기이원론이다. 이는 중하고 기는 천하므로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도덕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경 사상을 강조하였다. 수기가 곧 치인이라고 하며, 수기를 중요시했다. 공부는 유학의 이론서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황은 교육의 방법으로 입지, 거경궁리, 잠심자득, 숙독 등을 주장했다. 입지는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뜻을 세워야 하며 정신적으로 학문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학문을 하려는 동기가 명확해야 학문을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거경궁리의 거경은 .. 2021. 6. 27.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켜 낸 김영환 장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켜 낸 김영환 장군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고려인들의 뛰어난 목판인쇄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팔만대장경을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의 필체라고 극찬했다. 현재에도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에는 인민군들이 스며 들어 하마터면 팔만대장경이 없어질 뻔 했다. 당시 김영환 장군이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가야산을 폭격하라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8월 당시 공군 대령인 김영환 장군에게 인민군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가야산을 폭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인민군 빨치산의 은둔지를 폭격하여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김영환 장군은 편대를 이끌고 가야산으로 날.. 2021. 6. 24. 국군포로 장무환 일병 45년만에 귀환 국군포로 장무환 일병 45년만에 귀환 1948년 장무환씨는 국방경비대로 국군에 입대한다. 이당시는 모병제라 배고픔과 경제적 어려움에 군대에 입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무환도 이렇게 입대를 희망하여 국방경비대에 들어갔으나 폐에 문제가 생겨 8개월만에 의병 제대를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장무환은 또 다시 입대한다. 이번에는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에 입대한다. 장무환의 고향 경북 울진까지 인민군들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장무환은 인민의용군에 편성된다. 전쟁 속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금강산까지 끌려간다. 그런데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도망을 가 고향 울진으로 돌아온다. 수백 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도망온 것이다. 1952년 11월 또 장무환은 입대 영장이 나와 또 .. 2021. 6. 1. 이전 1 ··· 77 78 79 80 81 82 83 ··· 87 다음